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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현대물리학

2009/08/09 20:36, 글쓴이 tunanbeef
인터넷 서핑도중 맘에 드는 글이어서 퍼 왔습니다.

출처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우주에는 과연 절대적 존재 또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우주의 중심은 어디이며 영원한 것은 존재하는가. 불교와 자연과학의 관점에서는 어떤 존재에도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절대성이나 중심을 부여하지 않는다. 만일 있다면 우주 전체와 우주 법칙 그 자체만이 절대적이며, 삼라만상의 모든 개체들은 다 연관성이 있고 각각 대등한 존재로서 스스로 중심이 될 뿐, 그 어떤 사물이나 인격체도 완전히 독립적이면서 절대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신(神)도 부처도 절대자일 수 없다. 이 차원에서는 불교의 절대평등의 경지를 말하고 있으며, 부처는 단지 비밀스런 법(法)의 경계를 먼저 열어 보인 스승일 따름이다.




불교는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자기 자신에서 비롯된다고 보아 오직 수행을 통하여 우리 자신과 세계의 본래 모습을 깨달음으로써 스스로 속박을 끊고 완전한 자유 곧 해탈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전체가 한 생명인 우주 속에 평등하게 참여하고 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구성원은 각자 스스로를 창조하고 유지해 나가는 주체일 뿐, 이러한 법계를 벗어나 존재하는 그 어떤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복종해야 할 외부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치 않으며 밖에서 어떤 구원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신(神)을 어떻게 볼까?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절대유일신을 말한다면, 불교는 무신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의미가 깨달음에 있으므로, 신조차도 진리의 결집체일 수 없고 유일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아직도 업장에 눌려있는 깨우쳐야 할 몸 없는 중생으로 보아 결코 경외시하거나 숭배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제선사의 살불살조(殺佛殺祖)가 말해주듯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부처마저 신격화⋅관념화 하지 않기 위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고 가르치는 마당에 하물며 귀신이랴. 그러기에 종교생활에서는 물론 사회생활에서도 신이나 지도자에게만 의존하는 노예근성을 불교에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에서 절대좌표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와 같다. 예를 들어, 다리 위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거나 잔디밭에 누워 떠가는 구름을 볼 때 사실은 강물이나 구름이 흘러가는지 내가 흘러가는지 알 수 없고,12) 또 나란히 서 있던 두 차 중 어느 하나가 움직일 때 옆 차가 움직이는지 내 차가 움직이는지 모를 때가 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좌표계가 없기 때문에 어느 것이 움직이고 어느 것이 정지해 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다만 두 물체는 상대적으로 움직인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모든 물리법칙, 즉 물리량들의 관계식은 두 계에서 동등하게 성립되므로 어떤 실험으로도 두 좌표계의 우위를 판별할 방법은 없으며, 결국 두 계는 상대적으로 동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고방법은 모든 물체의 운동에 대하여 참고하고 비교하여 이것은 움직인다, 저것은 정지해 있다고 말해 줄 절대좌표계가 우주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싶은 인간의 집착에 커다란 변화를 강요하게 된다. 실제로 19세기 후반까지 물리학자들은 에테르13)라는 가상의 물질이 이 우주공간에 꽉 차 있다고 가정하여 절대 고정좌표계로 삼으려고 시도하였다. 에테르라는 절대정지계가 있다면 지구는 그것에 대해 운동하고 있으며,14) 지구의 자전․공전을 생각하면 지구상에서 측정하는 빛의 속도에 그 영향이 나타날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여러 가지 실험적 사실은 에테르라는 물질이 대기 또는 진공 중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왔다. 즉 서로 다른 운동을 하고 있는 좌표계에서는 빛의 속도가 다르게 관측되기 때문에, 에테르에 대한 지구의 운동, 곧 절대정지계에 대한 지구의 상대적 운동을 검출한다는 것은 지구상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는 빛의 속도가 차이가 나는 것을 측정하여 쉽게 증명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이를 검증하기 위해 1887년 마이켈슨(A.A. Michelson, 1852∼1931)과 몰리(E. Morley, 1838∼1923)가 시도한 정밀간섭실험 결과, 여러 방향으로 측정한 빛의 속도가 동일한 값으로 관측됨으로써 예측이 빗나갔던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 여러 제안이 나왔지만 최종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등장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광속도불변의 원리에 의해 절대정지계의 존재, 즉 오랜 동안 물리적 실체로 상정되고 있던 에테르의 존재는 물론 절대정지계 자체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절대좌표계는 미련 없이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21세기에 ‘절대성의 부정’에 근거를 둔 상대성이론을 의심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또한 무엇이 우주의 중심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지구를 중심으로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소위 천동설(天動說)에서처럼 지구가 물질세계의 기하학적 중심에 위치하여야 지구가 우주 역사 전개의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생물은 오직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여야 인간이 역사의 중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현대과학의 발전과 함께 신중심, 지구중심적 사고에서 인간중심으로 이동하기는 했지만, 인간중심마저 철저히 반성하게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현대물리학에서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상대성의 인식과 절대좌표계의 포기는 실로 인간사고의 혁신적인 진전이며, 고정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고 무상한 상대성 그 자체를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불교의 연기론과 기본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상대적 인식을 불교에서는 일수사견(一水四見)으로 비유하면서 유연하게 인정하고 있다. 같은 물이라도 ‘천상의 사람이 보면 유리로 장식된 보배로 보이고, 인간이 보면 마시는 물로 보이며, 물고기가 보면 사는 집으로 보이고, 아귀가 보면 피고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인식 뿐 아니라 쓰임새로도 달라지게되는데, ‘물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는 백유경(百喩經)의 말씀이 그 좋은 예이다.




반면에 서구역사에서 종교가 상대성과 유연성을 상실한 채 편견과 독선으로 저지른 과오는 과학과의 마찰에서도 적지 않은 사례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주론의 문제였는데, 기독교의 엄격한 교리해석 때문에 우주에 관한 한 논의 자체가 자유롭지 못했고,15) 심지어는 우주가 유한한 지 무한한 지에 대한 논의로 인해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16) 고대 사람들이나 기독교인들은 자연을 초월한 어떤 존재, 즉 신이 세상과 자연을 창조했다는 우주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미루어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들이 24시간을 주기로 회전운동하고 있다’는 천동설이 2세기 초엽 프톨레마이오스에 처음 의해 제안되었고, 6세기 경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다시 정리되고 주장되었다. 이러한 ‘지구중심적 우주론’은 중세 교회의 교리로 채택되어 소위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다. 1천5백여 년이나 부동의 권위를 누려 왔던 세계관이 혁명적으로 바뀌게 된 일련의 사건, 즉 과학혁명은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지동설(地動說)을 발표하면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막이 오르게 된다.17)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일명 태양중심설)을 발전시킨 과학자는 갈릴레이였다.18) 그러나 그는 로마 교황청에 고발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수난을 겪게 되는데, 생명에 위협을 느낀 그가 공개적으로는 지동설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지만,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현대 과학은 지구와 태양만이 아니라 우리 은하도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 때문에 우주의 어느 곳에도 중심이라고 할 만한 곳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중심이 있어야 한다면 우주의 모든 부분이 다 중심이다.19) 그들이 모두 중심이고 그들이 각각 모두 동등한 주인공이다. 자신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이 우주의 일원이 되었을 때 그 모두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주인공이라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화엄의 세계이며,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부처님의 선언도 바로 이러한 절대평등, 절대자유를 바탕으로 한 인간해방이자 생명해방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가 여러 민족, 다양한 문화 속에 전파되면서도 비교적 갈등을 야기시키지 않고 융화될 수 있었으며,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지적했던 “세계적인 종교 중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워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 종교는 불교뿐이다”라는 사실은 불교의 삼라만상에 대한 절대성‧영원성의 부정이 그 깊은 뿌리였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의 견해를 주장할 때에는 ‘이것은 내 견해, 내 생각이다’고 해야 하는데, ‘이것만이 진실하고 다른 것은 모두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악은 결코 악으로 갚아지지 않는다. 인내와 관용만이 악의 순환을 막을 수 있다”고 독선과 편견을 경계하고 양보와 화해를 덕으로 삼을 것을 누누이 지적하신 바 있다. 2천5백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이 말씀이 새삼 절절한 것은 왜일까. 일부 국가와 정치지도자들이 자유⋅인권⋅평화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행복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희생정신과 인간해방을 강변하고 있지만, 그것은 짐짓 탐욕을 숨긴 경우이거나 아니면 종교와 결탁한 집단최면에 의한 자기 합리화 또는 대중 속이기에 불과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절대신을 절대로 믿는 종교근본주의20)의 독선과 편견에 의한 배타성과 호전성은 그 폐해가 실로 심각하다 할 것이다. 일체 만물이 동등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불교적 사고와 달리, 절대신의 존재와 그 완전성⋅불변성⋅유일성⋅절대성⋅무모순성⋅정지성을 확신하는 종교일수록 세계를 선과 악으로 간단히 구분하고21)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성이나 자신만이 옳다는 착각으로 모든 것을 자기 잣대로 재단함으로써 결국 증오와 갈등을 부추기고 재생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서구의 역사를 4백여 회의 종교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 간의 증오와 충돌이 그칠 새가 없었던 것은 절대기준과 흑백논리가 그 뿌리이며 과연 이렇게 전쟁을 충동질하는 종교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끔 한다. 현대물질문명을 꽃피우고 있는 21세기를 사는 현재 지구상에도 성전(聖戰) 또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이란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가. 절대성의 부정, 다양한 가치의 상대적 인정, 관용과 화합은 평화를 염원하는 인류가 늘 되새겨 봐야 할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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